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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모셔온 글) 이름 임희영 (partizan8)
날짜 2003년 11월 27일 16시 13분 11초 조회 135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막 8:34-38)
김재성 목사
요즘 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에 빚에 쪼들린 주부가 어린 두 자녀를 아파트 높은 곳에서 강제로 떨어뜨리고 자기도 떨어져서 죽은 일이 있었고, 또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여 큰 충격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한 사람은 13,055명인데, 이는 교통사고로 숨진 7,090명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수치이다. 특히 IMF 이후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경기 침체로 실업자, 신용불량자가 늘면서 이른바 생계형 자살이 늘고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우울증과 같은 개인의 정신적 요인이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생계형 자살의 경우, 사회가 그들로 하여금 죽게 만들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교회의 입장은 대개,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든가, 그러니까 자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식의 도덕적 판단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살을 감행할 정도로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도덕적인 평가나 판단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 교계신문을 보니,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성경구절이라면서, 이런 구절을 제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막 8:36-37) 얼른 보기에 적절한 구절을 선택한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다른 교회들에서도 최근에 이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택한 곳이 많았을 것이다. 이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다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제 목숨을 잃으면 그 모든 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며, 이미 유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말이다(시 49:6-8).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의 끝부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예수의 말이 바로 이런 구절들과 같은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가 제자들과 무리에게 한 것이다.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을 보면, 예수가 장차 수난받게 될 것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말했을 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의를 하였다. 이렇게 항의하기까지 하면서 그가 말하려고 한 것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는 그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이례적으로 심하게 꾸짖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갑자기 목숨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을 리는 없다. 그 말은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 말 바로 앞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이것은 본래 로마군 전투 사령관이 부하들을 격려할 때 사용한 말과 같다. 로마군 사령관은, 용감한 자는 승리를 거두어 목숨도 보존하고 명성도 얻게 되지만, 겁이 나서 도망하는 자는 흔히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로마군 사령관은 자기는 뒤에 서 있으면서 부하들을 앞으로 진격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지만, 예수는 자신이 앞장서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면서 남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다. 로마군 사령관이 부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용감히 싸워 적을 무찌르라는 것이지만, 예수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사랑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로마군 사령관은 생존의 전략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예수는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생명의 길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짧은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 마태와 누가에는 이 부분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없다. 아마도 원래적 형태는 “나를 위하여”일 것이다. 이는 초대교회 사람들이 무엇을 삶의 목표로 삼았는지 보여준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이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위하여, 그저 생존을 위하여 살 수는 없었다. 그건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 진정한 삶은, 자기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생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누구를 위해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바로 이 구절 다음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이 구절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그들에게 선포한 다음에, 이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부와 권력을 다 얻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목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생존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삶을 누리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에 따라서 초대교회는, 그들이 “예수를 위하여” 살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부귀영화를 누려도 그것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본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를 위하여”라는 구절을 쉽게 “교회를 위하여”로 해석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다. 본래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난 그 사랑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어도 잃은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목숨의 개념, 사는 것의 개념이 새롭게 바뀐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숨을 쉬거나 맥박이 뛰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수를 위하여”, 조금 더 확대해석한다면, “누군가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가 그 판단 기준이다.

이제 다시 처음 제기한 문제로 돌아와 보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는 구절은 자살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목숨이 소중하니까 자살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구절이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새롭고도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사람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몰라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초대교회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삶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자기들도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엔도오 슈우사쿠(遠藤周作)의 책 『나의 예수』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2차대전 당시 한 폴란드인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는 일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기부금을 얻으러 고국에 들어갔다가 나치에게 붙잡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거의 굶다시피 하면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다. 탈출자가 속출했는데, 수용소 당국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탈출자가 잡히면 그 수만큼 한 방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방법까지 사용했다. 어느 날 점호시간에 나치 장교가 탈출하다 잡힌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형을 선고하고 있었다. 사형 방법은 감방에 가두어놓고 굶겨서 죽이는 것이었다. 잡혀온 사람 가운데는 비교적 나이가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 내어 울었다. 바로 그때 뒷줄에 서 있던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한발 성큼 나서면서 나치 장교에게 청하였다.

“내가 그 사람 대신에 죽었으면 합니다. 나는 카톨릭 신부이기 때문에 처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죽더라도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퍼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아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 대신 죽는 게 낫겠습니다.”

짐승 같은 나치 장교도 할 말을 잃은 듯했고, 잠시 후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그 젊은 사람은 살고 신부는 죽게 되었다.

그 신부는 오래오래 장수를 누리는 복은 얻지 못했지만, 예수가 말한 바, 온 세상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그 소중한 목숨을 얻었다 할 것이다. 그를 사형 집행한 나치 장교는 그 후로 오래오래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짐승의 삶이지 사람의 삶이 아니다.

문제는 그 신부의 희생의 대가로 살아나게 된 그 젊은이이다. 그는 그 후로 아내도 만나고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그 자신의 것만은 아니다. 그는 평생 그 신부의 희생과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서 진정한 삶은, 그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신부처럼 자기도 또 그 누군가를 위해 자기 삶을 바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에게 아무리 큰 슬픔이나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생명은 그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며, 또 다시 누군가를 위해서 바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의 사정이야 얼마나 절박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 사정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일제치하나 6.25전쟁 직후에도 지금같이 자살하지는 않았다. 아니 선진국일수록 자살률이 더 높다. 그것은 꼭 가난이나 고통의 문제는 아니다. 삶의 의미 문제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내 삶은 또 다른 그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삶의 의미는 없다. 우리 모두가 저 폴란드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처럼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 의해서 살아난 그 젊은이의 자리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월간 <홀씨> 200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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