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문】 예수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참 말입니까? 도대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이 질문을 해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1절 이하를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 마을에 살고 있던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베푸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자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묻자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나신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와의 구별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를 불문하고 여기서 처녀(동정녀, virgin)라고 하는 의미를 오직 생물학적인 뜻에서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로 주장되어 왔습니다. 근본주의자들(성서의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명제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을 ‘이단시’ 했습니다. 전투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설명할 수 없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앙 명제라고 주장하면서 이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을 ‘빌라도식 재판관’의 입장에서 공격하곤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성서에 있는 여러 표현들은 표층의식에 근거를 둔 합리적 의식에 따른 것이 아니고 심층의식에 뿌리내린 상징적 차원을 가진 언어표현이라고 하는 주장들이 제기되면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여기서 ‘처녀’라고 하는 말은 생물학적인 의미와는 관계없이 ‘예수는 확실히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우리들 보통 인간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라는 신앙의 진실을 이 ‘처녀’라고 하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요약됩니다.
저도 한때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 어떠한 문제를 제기해 보지도 않았고 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그대로 믿고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교리는 ‘신앙고백’의 대상이지 ‘어떠한 합리적 설명’도 허락되지 않는 무풍지대에 있는 교리입니까? 이 교리에 문제를 제기하면 불신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신앙심이 좋은 교인입니까?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기준입니까? 오늘 제게 이 질문을 던진 분은 적어도 이런 고민은 하셨을 걸로 생각됩니다. 저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주고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여러 자료들을 들추어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먼저 이 주제에 대한 역사적인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서는 예수의 탄생이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며 예수가 이미 30세가 되어 세례를 받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예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마가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신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저자인 마가가 이 이야기를 알지 못했거나 언급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의 탄생 이야기는 비치지도 않고 있으며 복음서들보다도 시대적으로 먼저 쓰여진 바울 서신들에도 예수 탄생 이야기는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언급한 사람은 안디옥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한 사람뿐이었고 2세기 신학자 중에서는 저스틴(Justin)과 아리스티데스(Aristides)만이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교회에서는 2세기 중엽부터 대부분 이 교리를 수용하였으며 거기에는 정통과 이단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2세기와 3세기에는 영지주의와 가현설, 양자설(예수가 세례를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양자로 삼으셨다는 주장, 사모사타의 바울이 주장하였다) 등에 대항해서 교회는 이 교리를 신앙의 규칙과 같은 것으로 신앙 서적에 포함시켰습니다.
유럽에서 17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은 성서에 있는 여러 표현들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통해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성서를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 비판적인 방법을 통해 성서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계몽주의 세례를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다양한 종교들을 그 각각의 컨텍스트(삶의 자리) 안에서 비교하면서 동정녀 탄생 주제는 고대사회에 꽤 널리 퍼졌던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명인사나 위대한 영웅들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한다는 소리를 즐겨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흔한 이 주제는 널리 퍼져 있어서 가령 아버지의 소재가 분명한 사람에게조차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소문을 낼 정도라는 것입니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그가 죽은 후 400년 후에, 우리는 그의 부모를 알고 있는데도 그가 신성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가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편재한 주제였고 그 발원지는 유대 지역이라기보다는 헬라 세계였습니다. 구약성서 이사야에서는 예언적으로 “젊은 처녀”(이사야 7:14)를 말했으며 누가복음서에 이 주제가 들어와서 그 후에 교회 역사 안에 존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0세기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신약성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동정녀 탄생 교리를 ‘신화’(myth)로 취급했습니다. 불트만이 말한 ‘신화’란 인간이 창작해 낸 ‘허구’(픽션)나 ‘인간의 원시적인 우매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초월적인 차원의 이 세상적인 표현’입니다. 불트만의 최대 관심은 신약성서의 내용들을 오늘날 과학의 세계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의미 있고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는 신약성서 안에 있는 복음서들이 쓰여졌을 때(1세기)의 세계관을 신화적인 세계관으로 규정했습니다. 불트만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전했을 때에 당시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수용했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성서에 있는 내용을 제거해 버리고 무시해버려도 되는가? 불트만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비신화화론’이라는 해석학(이해의 기술)을 고안해 냈습니다. ‘비신화화론’이란 성서 안에 있는 신화적인 내용들을 제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신화로 해석해 냄으로써 신화가 성서 텍스트(본문)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불트만은 현대인들에게 성서의 내용들을 의미 있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독일의 또 다른 신학자 판넨베르크와 브루너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기본적으로 성육신 교리와 모순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 전부터 선재(preexistent) 하신 분인데 어떻게 한 인간(여인)에게서 시작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되기 때문입니다. 브루너는 이 교리는 예수의 진정한 인간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우리와 똑같은 출생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마태와 누가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만약 전설이나 신화라면 동정녀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개연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교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교리를 둘러싼 쟁점은 이 교리가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에 필수적인가 아닌가, 즉 그리스도의 인격의 교리에 필수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 교리가 지닌 의미는 그리스도의 인격 교리에 필수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동정녀 탄생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신비,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합당하게 가리켜 줍니다. 이 교리는 기본적으로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을 지닌 인간이셨지만 인간성 자체가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되는 능력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성은 능동적이고 성취적이며 창조적이고 군림하는 식이 아니라 수용적으로 성육신(하나님이 인간이 되신)의 신비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일을 새로 시작했을 때 솔선해서 전적인 주도권을 행사한 것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는 마리아가 보여 준 대로 인간의 자유로운 굴복, 수용, 그리고 순종과 아울러서 실행되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역사적인 기원이나 토론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에 들어와서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을 배웠을 때 성서를 보는 매우 귀중한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의 시각에서 성서를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성서를 읽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해방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봅시다. 예수에게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보다 동정녀에게서 났다는 것이 예수를 가치 있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예수께서 나를 죄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그분은 나의 구원자이시다라고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 교리가 아니라 그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교리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냐 비그리스도인이냐를 판단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수많은 전쟁터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지고 환경이 파괴되어 가고 있지만 이러한 전쟁이나 환경 문제에 대한 입장을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비그리스도인인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해방신학의 시각에서 볼 때 동정녀 탄생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투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해방자가 가난한 자들로부터 이 세상에 와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평범한 한 여인 마리아는 빛을 낳았고 해방자이며 구속자의 어머니입니다. 비천한 한 여인에게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오늘도 곳곳에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아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임은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