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1-우리는 성서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1)
김수남 목사 (백합교회 · 총회교육원 · 한신대학원 강사 · 신약학)
우리는 성서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1)
-부정확성-
저는 지난 1994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학교에서 성서학(신약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벌써 11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강의 시간 중에 때로는 학생들과 성서를 두고 격론을 벌이기도 했고, 감동적인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경험 가운데, 저로서는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우리 ‘총회교육원’에서 지난 11년간 단 한 학기도 빼놓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친 일입니다. 알다시피 총회교육원에는 우리 총회에서 유일하게 인정한 전도사 자격을 주는 전도사대학과정과 선교신학대학원과정이 개설되어 있습니다. 제가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곳에서 우리 기장의 가장 ‘표준적인’ 분들을 상대로 강의함으로써, 최소한 우리 교단의 신앙생활에서 ‘성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비교적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육원에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우리 교단의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혹은 장로님)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열성도 대단하고, 신앙 경력도 오래 되고, 신앙의 자세도 신실하고, 성서도 많이 보고, 교회에서 행하는 성서연구에도 여러 번 참석한, 여러 모로 우리 기장의 표준적이고 또한 모범적인 분들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모범적인 열성에도 불구하고, 그 열성에 ‘성서는 없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매우 유감스럽습니다만, 조금 힘주어 말하면, “말로만의 성서사랑”이 우리 현실의 모습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성서를 잘 모르기도 하고 너무나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 표준적인 분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이 글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성서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글을 쓰는 저 자신이나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작게나마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강의 첫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언제나 “간단한 성서 퀴즈”를 냅니다. 한 10문제쯤을 함께 풀다보면 금방 시간이 갑니다. 그 문제는 주로 성서본문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묻는 그야말로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인원수에 맞추어 적게는 3-4명, 많게는 5-6명 씩 한 조를 이루게 한 다음, 문제를 듣고 같은 조끼리 토론한 다음, 각 조의 대표가 답을 발표하는 식입니다. 1등을 하는 팀에게는 늘 초콜렛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이런 퀴즈를 지난 11년간 매학기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매번 결과는 거의 같습니다. 10문제 가운데 고작 2-3문제를 맞춘 팀에게 초콜렛이 돌아갔고, 단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하는 팀도 부지기 수였습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한 후 이름을 바울로 바꿨다?
제 문제의 단골 메뉴 가운데에 ‘사울/바울’이라는 이름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사울이 아니라 신약의 사울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모든 학생들이, 세 차례의 선교여행을 통해서 처음 그리스도교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흔히 ‘사도’라고 하는) 바울 선생의 이름이 원래 사울이었는데, 다마스쿠스에서 신비한 체험(회심)을 한 뒤에 이름이 ‘바울’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즉시 제가 묻습니다. 성서 어디에 그런 말이 씌어져 있느냐고 말입니다. 당연히 학생들은 답변을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성서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있다’든가, ‘바로 어제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 했다’든가, 혹은 ‘다들 그렇게 말한다’는 둥 하면서 선뜻 자기주장을 거두기를 거부합니다. 너무 자명한 사실로 머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다시 그런 학생들에게 그 주장의 성서적 근거를 댈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성서 어디에도 사울이 회심을 계기로 이름을 바울로 바꿨다는 대목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성서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당연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스개 말에 ‘소설을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목사님들에게 그런 설교를 들었다는 학생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서, 성서를 부정확하게 아는 것은 비단 평신도들만이 아니라는 씁쓸한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성서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나 설교할 때는 절대로 성서에 기록된 내용에 보태거나 빼지 않아야 합니다. 왜 사도행전의 기자가, 다마스쿠스의 회심 사건(9:1-19), 그 후 처음으로 다마스쿠스에서의 전도활동(9:20-25),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야기(9:26-31) 등을 보도할 때까지, 그리고 건너뛰어서, 바나바와 더불어 파송 받은 이야기와 키프로스에서의 전도활동(13:1-8)을 보도할 때까지도 모든 사건의 주인공 이름을 ‘사울’로 표기하다가 갑자기 13장 9절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이방 세계에서 사울이라는 유대식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헬라-로마식 이름이 더 일반적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저자가 사울이라는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이름에 ‘이방인의 선교사’라는 신앙적인 의미를 두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학생들의 ‘소설쓰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의 뜻을 들추어냅니다. 아니 아예 ‘외우고’ 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다 박해했던 사울!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다마스쿠스에서 뜻하지 않게 신비한 체험을 하고 회심했다! 그리고 ‘사울-큰 자’라는 자기 과시적인 이름을 버리고 ‘바울-작은 자’라는 더할 수 없이 겸손한 이름으로 개명(改名)했다!” 매우 멋지고 극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나친 ‘자기감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감정이 본문에도 없는 내용을 끌어오고, 결국에는 성서(canon)와는 무관한 사적(私的) 신앙을 만들어 냅니다. 사울이 큰 자요 바울이 작은 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성서 본문에 ‘사울은 그 과시적인 이름을 버리고 겸손한 이름으로 개명했다’라고 씌어있지 않는 한, 과도한 해석은 그야말로 ‘과도’할 뿐입니다. 사랑도 과도하면 욕심이 되고 결국 그 욕심이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닌지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다음에는 단답형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몇 년인가?” 이 물음에 답을 하는데, ‘앵무새’가 따로 없습니다. 한결같이 “3년이요!”라고 합창합니다. 만일 ‘3년 쯤’이라고 답한다면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지만, ‘3년’은 물론 아니지요. 우리는 다만 추측을 할 뿐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유월절 축제를 기준삼아 보면,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 기간이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 미만이고,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는 2년이 조금 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학생들이 3년을 공생애 기간으로 외우고 있는 것은, 분명히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입니다. 3년이라는 ‘전설’이 삼천리를 돌고 돌아 이제는 천만 그리스도인의 진리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 단답형 문제는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내실 복잡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두고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정도가 되는 분들은 적지 않은 혼란에 빠집니다. ‘사실’은 하나일 테고... 그런데 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 둘 중 하나는 틀렸다는 말인가? 성서에 틀린 곳이 있다???’ 믿음 좋은 분들에게 성서에도 틀린 말이 있다는 것은 일대재앙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러나 성서를 ‘있는 그대로’ 보면, 한 가지 사건이나 말씀을 두고 성서마다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곳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성서를 대하는 중요한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물론 3년이라는 전설은 말이 안 되지만, 성서를 서로 어긋남이 없는 ‘사실’의 기록이라고 믿는 것도 똑같이 문제입니다. 이런 태도는 성서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믿음’이요 자기욕심입니다. 성서의 내용 전체가 앞뒤가 꼭 들어맞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성서는 이래야한다”는 자기 전제를 거두어야 합니다. 먼저 성서의 내용, 즉 성서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야 합니다. 성서가 정확한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자기 전제에 집착하게 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성서 내용을 그 전제에 맞추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성서를 모두가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성서해석도 아니고 성서에 대한 믿음도 아닙니다. 이런 자기 전제 때문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생기는 지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보기로 하겠습니다.
문제는 다시, 본문의 내용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이나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성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등한 성서비평의 출발이며 동시에 우리 믿음의 주춧돌입니다. 어찌 보면, 모든 성서공부는 ‘성서가 나를 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먼저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앞에 말했던 “3년”이라는 앵무새의 목소리를 더 이상 내지 않는 것입니다.
숲은 안보고 나무만 본다?
이번에는 조금 업그레이드된 문제입니다. 학생들에게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유명한 ‘사랑의 시’를 외우게 합니다. 백발백중! 저 유명한 사랑의 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시를 틀리지 않게 암송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과 치열한 논쟁을 하다가 갑자기 매우 서정적인 시를 그곳에 써놓았는가?” 말하자면, 그 시가 고린도전서라는 편지 전체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서술형이지요. 앞 선 질문에는 비록 ‘정확히’ 틀렸을망정 입을 모아 답변하던 학생들이 이 대목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도대체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다수입니다. 고린도전서라는 참으로 논쟁적이고 현장성 있는 편지 글을 전체로 보면, 13장의 시는 결코 서정적인 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모든 예식장에서, 모든 연애편지에서, 모든 사춘기 여학생의 일기장에서 이 시는 단연 인기 순위 1등입니다. 왜일까요? 거두절미! 숲은 무시하고 나무만 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사랑’은 달콤한 솜사탕이 아니라, 무서운 칼입니다. 내 노라 하는 이력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망각하고 교회를 혼란에 몰아넣고 있는 사람들-말을 잘해서 천사의 말까지도 흉내 내면서,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자기 소유도 자기 목숨까지도 내 놓을 수 있다고 소리치는(1-3절)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구하기 위해 바울이 내놓은 특단의 조치! 그것이 바로 13장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의 장(章)을, 그것도 앞부분은 자르고 뒷부분은 버린 채, 4절-7절까지만 가지고 주무르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입니다.
나무에만 관심하거나, 나무만을 아는 경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하면 666과 144,000과 두 짐승을 떠올립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장으로 알려진 11장만을 압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의 설교는 ‘대충’ 알면서 누가복음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모릅니다.
요즘도 성서공부를 그렇게 하는 교회가 있는지는 몰라도, 과거에는 주보 한 면에다 성서를 한 주에 한 장 정도 읽고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질문하고 답을 쓰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변변한 성서해설도 없던 시절에, 그저 성서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는, 참으로 우직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옛날 교회에서 주로 했던 그 우직한 성서공부의 방법이 정말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성서의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거나 외우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매주 성서를 한 장씩 읽어가게 함으로써 성서이야기의 흐름을 익힐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때그때 ‘해설서’에 눈을 돌리지 않고 성서본문에 익숙하게 함으로써, 성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또한 좋았습니다. 이렇게 옛날의 구식이 다시 생각나는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활용하는 양장제본의 깔끔한 성서연구교재라는 것들이 대부분 성서의 전체적인 흐름을 도외시한 채 이곳저곳 ‘필요한 부분’만을 따다가 자기주장에 이용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렸던 ‘열 단계 성경공부교재’가 그렇고 작금 교회에서 상종가를 친다는 ‘제자훈련교재’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성서라는 커다란 숲을 보게 하는 길안내가 없습니다. 한 가지 주제를 잡아 놓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성구를 이곳저곳에서 끌어다 씁니다. 성서학에서 가장 경계하는 소위 ‘증빙전적 성서인용’의 전형입니다. 그렇게 공부하면 특정교회의 신자가 되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성서를 공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전체적으로 또 ‘왼 통으로’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천만번 따라 외워도 요한복음이라는 책이 어떤 책인지는 모릅니다. 아무리 666의 정체를 정확히 안다고 해도 요한의 계시록이 왜 씌어진 책인지를 아는데 별반 도움이 안 됩니다. 여기저기서 성구를 뽑아다가 어떤 주제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복지를 위한 시청의 공무원쯤으로 활용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성서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것(필요한 부분을 잘라 쓰는 것이 아니라)이야말로 우리를 개 교회만 바라보는 신도가 아니라 개 교회와 이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거룩한 성서읽기’(Lectio Divina)도 과거 교회에서 즐겨 했던 ‘우직한 성서공부’와 원리상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읽기-성서공부에 영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위해 성구를 여기저기서 조금씩 잘라 쓰면서 어떻게 ‘영적’(혹은, 살아있는)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성서구절이 그 앞 뒷말과 이어지게 하라!” 언제나 가슴에 품어야할 모토가 아닐 수 없습니다.(계속)